그날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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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날 이후》는 소련과 동독 간의 군사력 증강으로 인한 미소 간의 긴장 고조를 배경으로 핵전쟁 발발과 그 이후의 참혹한 상황을 그린 1983년 ABC 텔레비전 영화이다. 핵전쟁으로 인해 캔자스시티가 파괴되고, 생존자들의 고통스러운 삶과 사회 붕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방영 당시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 영화는 핵전쟁의 공포를 생생하게 전달하며 반핵 메시지를 강조했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도 영향을 미쳐 핵 정책 변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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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 [영화]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감독 | 니콜라스 메이어 |
각본 | 에드워드 흄 |
제작 | 로버트 파파지언 |
주연 | 제이슨 로바즈 조베스 윌리엄스 스티브 구텐버그 존 컬럼 존 리스고 에이미 매디건 |
음악 | 데이비드 랙신 버지 톰슨 ("더 리버" 테마) |
촬영 | 게인 레셔 |
편집 | 윌리엄 폴 도니시 로버트 플로리오 |
제작사 | ABC 서클 필름 |
배급사(일본) | 쇼치쿠 후지 |
개봉일 | 1983년 11월 20일 |
상영 시간 | 126분 |
국가 | 미국 |
언어 | 영어 |
흥행 정보 | |
일본 배급 수입 | 7억 1500만 엔 |
관련 정보 | |
관련 작품 | 더 데이 애프터 |
2. 줄거리
영화는 미소 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시작된다. 동독 국경에서의 군사력 증강, 서베를린 봉쇄, 그리고 NATO와 바르샤바 조약 기구 간의 군사적 충돌은 핵전쟁 발발의 전조를 보여준다.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의 병원 의사 러셀 오크스, 미국 미주리주 해리슨빌의 농부 짐 달버그 가족, 351 전략 미사일 비행단 소속 공군 일등병 빌리 맥코이 등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소개된다.
어느 쪽이 먼저 시작했는지 불분명한 상태에서 전면적인 핵전쟁이 발발하고, 미국 중부의 캔자스시티와 로렌스는 핵 공격으로 궤멸된다. 이후, 미소 간 휴전 협정으로 즉각적인 인류 멸망은 면했지만, 생존자들은 방사선 피폭으로 고통받는다.[36]
2. 1. 핵전쟁 발발
소련이 동독 국경에서 군사력을 증강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동독은 서베를린을 봉쇄한다. 이에 미국은 최후통첩을 발동하고 병력을 경계 태세에 돌입시킨다.[36]다음 날, NATO군은 헬름슈테트-마리엔보른을 통해 봉쇄를 돌파하려 시도한다.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MiG 전투기가 서독 뷔르츠부르크를 공격한다. 소련이 서독을 침공했다는 소식이 퍼지고, 소련군은 풀다 갭을 통해 라인강으로 진격하며 전술 핵무기를 포함한 NATO의 방어 정책을 무시한다. 양측이 페르시아 만에서 해군 목표물을 공격한다.[36]
NATO는 소련군 상공에서 3개의 핵탄두를 공중 폭발시켜 진격을 막으려 하고, 소련의 핵 장치는 브뤼셀에 있는 NATO 지역 군사 본부를 파괴한다. 결국 ICBM이 러시아를 향해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며, 캔자스 상공에서는 SAC의 공중 지휘소가 전면적인 소련의 공격을 추적한다. 영화는 누가 먼저 발사했는지 의도적으로 불분명하게 남겨둔다.[36]
고고도 핵폭발의 EMP로 차량이 파괴되고 전력망이 붕괴된다. 핵 미사일은 군사 및 민간 목표물 모두에 쏟아진다. 캔자스시티는 혼란에 빠지고, 많은 사람들이 소각되거나 섬광 실명을 겪는다.[36]
2. 2. 캔자스시티와 로렌스의 파괴
미소 간 무력 충돌로 인해, 어느 쪽이 먼저 실행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전면적인 핵전쟁이 발발한다. 미국 중부 캔자스시티는 평화로운 도시였지만, 시내 미사일 사일로[36]에서 동구권 진영 도시를 향해 ICBM이 발사되고, 소련 역시 미사일 공격을 한다. 착탄까지 30분밖에 남지 않은 가운데, 시민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고속도로로 쇄도한다. 곧 고고도 핵폭발의 일격으로 도시 전역의 전자 기기가 파괴되고, 이어서 수 발의 미사일이 착탄하여 캔자스시티는 다른 미소의 대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한순간에 궤멸된다.[36]핵폭발에 따른 파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방사선 피폭에 의한 죽음의 그림자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36]
2. 3. 핵전쟁 이후의 생존
핵전쟁 이후, 생존자들은 엄청난 어려움에 직면했다. 핵 낙진으로 인한 방사능 피폭은 생존자들의 건강을 위협했고, 식량과 물 부족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더욱 심화시켰다. 단파 라디오를 통해 캔자스 대학교 조 헉슬리 교수는 핵 낙진의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피난처와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생존자들은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의료 시스템은 붕괴되었고, 의약품과 의료 인력 부족은 부상자와 환자들을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로렌스 대학교 병원으로 걸어간 오크스 박사는 환자들을 치료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낸시 바우어 간호사와 같은 의료진도 수막염과 같은 질병으로 사망하면서 의료 시스템은 더욱 악화되었다.
사회 질서는 무너지고, 생존을 위한 약탈과 폭력이 만연했다. 미국 방위군이 질서 회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즉결 처형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등 혼란은 계속되었다. 짐 달버그와 같이 자신의 터전을 지키려던 사람들도 불법 점거자에게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사건들이 발생했다.
미국 대통령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휴전 소식과 함께 구호를 약속했지만, 이미 폐허가 된 세상에서 생존자들은 절망과 싸워야 했다.
3. 등장인물
배역 | 배우 |
---|---|
러셀 오크스 박사 | 제이슨 로바즈 |
헬렌 오크스 | 조지앤 존슨 |
마릴린 오크스 | 카일 알레터 |
짐 달버그 | 존 컬럼 |
이브 달버그 | 비비 베쉬 |
데니스 달버그 | 로리 레틴 |
대니 달버그 | 더그 스콧 |
졸린 달버그 | 엘렌 안소니 |
낸시 바우어 간호사 | 조베스 윌리엄스 |
샘 하치야 박사 | 캘빈 정 |
오스틴 박사 | 린 맥카시 |
월렌버그 박사 | 로산나 허프만 |
란도스카 박사 | 조지 페트리 |
줄리안 프렌치 | 조나단 에스트린 |
병원 남자 | 웨인 나이트 |
스티븐 클라인 | 스티브 구텐버그 |
조 헉슬리 | 존 리스고 |
앨리슨 램섬 | 에이미 매디건 |
빌리 매코이 일등병 | 윌리엄 앨런 영 |
브루스 갤러틴 | 제프 이스트 |
워커 목사 | 데니스 립스콤 |
데니스 헨드리 | 클레이턴 데이 |
엘렌 헨드리 | 안토니 베커 |
알도 | 스티븐 퍼스트 |
톰 쿠퍼 | 알리스 하워드 |
비니 콘래드 | 스탠 윌슨 |
전화하는 남자 | 해리 부긴 |
3. 1. 주요 등장인물
; '''오크스 가족'''- 제이슨 로바즈 - 러셀 오크스 박사 역
- 조지앤 존슨 - 헬렌 오크스 역
- 카일 알레터 - 마릴린 오크스 역
; '''달버그 가족'''
; '''병원 직원'''
- 조베스 윌리엄스 - 낸시 바우어 간호사 역
- 캘빈 정 - 샘 하치야 박사 역
- 린 맥카시 - 오스틴 박사 역
- 로산나 허프만 - 월렌버그 박사 역
- 조지 페트리 - 란도스카 박사 역
- 조나단 에스트린 - 줄리안 프렌치 역
- 웨인 나이트 - 병원 남자 역
; '''기타'''
- 스티브 구텐버그 - 스티븐 클라인 역
- 존 리스고 - 조 헉슬리 역
- 에이미 매디건 - 앨리슨 램섬 역
- 윌리엄 앨런 영 - 빌리 매코이 일등병 역
- 제프 이스트 - 브루스 갤러틴 역
- 데니스 립스콤 - 워커 목사 역
- 클레이턴 데이 - 데니스 헨드리 역
- 안토니 베커 - 엘렌 헨드리 역
- 스티븐 퍼스트 - 알도 역
- 알리스 하워드 - 톰 쿠퍼 역
- 스탠 윌슨 - 비니 콘래드 역
- 해리 부긴 - 전화하는 남자 역
; '''더빙 성우'''
- 옥스 박사: 제이슨 로버즈 (西村晃|니시무라 아키라일본어)
- 짐: 존 칼럼 (小林勝彦|고바야시 가쓰히코일본어)
- 스티븐: 스티브 구텐버그 (村山明|무라야마 아키라일본어)
- 헬렌: 조건 존슨 (中西妙子|나카니시 묘코일본어)
- 매코이: 윌리엄 알렌 영 (銀河万丈|긴가 반조일본어)
- 하치야 박사: 캘빈 정 (津嘉山正種|쓰가야마 마사네일본어)
- 헉슬리: 존 리스고 (池田勝|이케다 마사루일본어)
- 이브: 비비 베쉬 (沢田敏子|사와다 도시코일본어)
- 낸시: 조베스 윌리엄스 (弥永和子|야나가 와코일본어)
- 기타: 沖田三夫|오키 다미오일본어, 土井美加|도이 미카일본어, 石丸博也|이시마루 히로야일본어, 菊池英博|기쿠치 히데히로일본어, 冨永みーな|도미나가 미나일본어, 大久保正信|오쿠보 마사노부일본어, 平林尚三|히라바야시 쇼조일본어, 藤本譲|후지모토 조일본어, 横尾まり|요코오 마리일본어, 郷田奈穂子|고다 나오코일본어, 安西正弘|안자이 마사히로일본어, 丸山詠二|마루야마 에이지일본어, 高畑淳子|다카하타 아쓰코일본어, 高島雅羅|다카시마 마라일본어, 秋元羊介|아키모토 요스케일본어, 西村知道|니시무라 도모미치일본어, 津田英三|쓰다 에이조일본어, 谷口節|다니구치 세쓰일본어, 幹本ユキ|미키모토 유키일본어, 柳沢紀男|야나기사와 노리오일본어, 田原アルノ|다하라 아루노일본어, 鷲野巣鼓|와시노 스즈쿠일본어, 中村友和|나카무라 도모카즈일본어, 佐々木豊|사사키 유타카일본어
3. 2. 조연
배역 | 배우 | KBS 더빙 (1986년 5월 24일) | TV 아사히 더빙 (1984년 10월 21일) |
---|---|---|---|
러셀 오크스 박사 | 제이슨 로바즈 | 니시무라 아키라 | |
짐 달버그 | 존 컬럼 | 고바야시 가츠히코 | |
스티븐 클라인 | 스티브 구텐버그 | 무라야마 아키라 | |
헬렌 오크스 | 조지앤 존슨 | 나카니시 묘코 | |
빌리 매코이 일등병 | 윌리엄 앨런 영 | 긴가 반죠 | |
샘 하치야 박사 | 칼빈 정 | 츠가야마 마사네 | |
조 헉슬리 | 존 리스고 | 이케다 마사루 | |
이브 달버그 | 비비 베쉬 | 사와다 토시코 | |
낸시 바우어 간호사 | 조베스 윌리엄스 | 야나가 와코 | |
마릴린 오크스 | 카일 알레터 | ||
데니스 달버그 | 로리 레틴 | ||
대니 달버그 | 더그 스콧 | ||
졸린 달버그 | 엘렌 안소니 | ||
오스틴 박사 | 린 맥카시 | ||
월렌버그 박사 | 로산나 허프만 | ||
란도스카 박사 | 조지 페트리 | ||
줄리안 프렌치 | 조나단 에스트린 | ||
병원 남자 | 웨인 나이트 | ||
브루스 갤러틴 | 제프 이스트 | ||
워커 목사 | 데니스 립스콤 | ||
데니스 헨드리 | 클레이턴 데이 | ||
엘렌 헨드리 | 안토니 베커 | ||
알도 | 스티븐 퍼스트 | ||
톰 쿠퍼 | 알리스 하워드 | ||
비니 콘래드 | 스탠 윌슨 | ||
전화하는 남자 | 해리 부긴 | ||
앨리슨 램섬 | 에이미 매디건 | ||
기타 | 오키 타미오, 도이 미카, 이시마루 히로야, 키쿠치 히데히로, 토미나가 미이나, 오쿠보 마사노부, 히라바야시 쇼조, 후지모토 조, 요코오 마리, 고다 나오코, 안자이 마사히로, 마루야마 에이지, 타카하타 아츠코, 타카시마 마라, 아키모토 요스케, 니시무라 토모미치, 츠다 에이조, 타니구치 세츠, 미키모토 유키, 야나기사와 노리오, 타하라 아르노, 와시노 스즈쿠, 나카무라 토모카즈, 사사키 유타카 |
4. 제작 과정
브랜든 스토다드 ABC 모션 픽처 사업부 사장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그날 이후''는 핵전쟁이 미국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영화이다.[7] 스튜 사무엘스는 이야기의 초점을 핵전쟁 자체가 아니라 그 여파에 두기 위해 제목을 ''그날 이후''로 정했다. 이후 베테랑 텔레비전 작가 에드워드 휴메에게 대본을 의뢰했다. 제작 자금을 지원한 ABC는 영화의 노골적인 묘사와 가족 친화적인 텔레비전 채널에서 이 주제를 적절하게 묘사하는 방법에 대해 우려했지만, 휴메는 핵전쟁에 대한 방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여러 초고를 거쳐 ABC의 승인을 받았다.
원래 영화는 미주리주 캔자스시티를 중심으로 제작될 예정이었으나, 촬영 장소 섭외 과정에서 캔자스주 로렌스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되어 변경되었다. 로렌스는 캔자스 대학교가 있고 캔자스시티와 가까우며, 미국의 "지리적 중심지"라는 점이 고려되었다.
핵 폭발 장면 묘사를 위해 최첨단 특수 효과 전문가들이 고용되었고, 스토리보드 작업이 진행되었다. 로버트 버틀러가 프로젝트 감독으로 고용되었으나, 계약 문제로 하차하고 니콜라스 메이어가 대신하게 되었다. 메이어는 검열 없이 핵전쟁을 다루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의심했지만, 대본을 읽고 감독직을 수락했다.
메이어는 검열이나 할리우드식 재난 영화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핵전쟁의 사실을 제시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ABC에 유명 배우를 출연시키지 말 것을 요구했고, ABC는 유럽 관객 유치를 위해 제이슨 로바즈를 캐스팅하는 데 동의했다.
메이어는 핵 연구에 몰두하며 미국 국방부 및 ABC 검열관과 갈등을 겪었다. 국방부는 소련이 먼저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점을 명확히 할 것을 요구했지만, 메이어와 제작진은 이를 거부했다.
1982년 7월, 메이어와 제작진은 캔자스시티를 방문하여 현지 배우들을 인터뷰하고 풍경을 물색했다. 할리우드 캐스팅 감독들은 캔자스시티의 쇼핑몰을 돌아다니며 현지인을 캐스팅했고, 로렌스 일간 신문은 엑스트라 모집 광고를 게재했다. 캔자스 대학교 연극 및 영화 교수가 현지 캐스팅을 담당했다.
연방 비상 관리청 캔자스시티 지사를 방문한 메이어는 핵전쟁 생존 계획에 대한 질문에 "완전한 농담"이라고 언급했다. 이후 대본에서 "햄프턴"을 "로렌스"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로렌스가 실제 도시이며 미국 중부를 대표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는 2개의 에미상을 수상하고 10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34] 수상 내역은 다음과 같다.
상 | 수상자 |
---|---|
제한된 시리즈 또는 특별 부문의 뛰어난 영화 음향 편집상 | 크리스토퍼 T. 웰치, 브라이언 코르시에, 그렉 딜론, 데이비드 R. 엘리엇, 마이클 힐켄, 프레드 저드킨스, 칼 마하키안, 조셉 A. 마이어, 조 멜로디, 캐서린 쇼어, 리처드 쇼어, 질 태거트, 로이 프렌더가스트 |
뛰어난 특별 시각 효과 업적상 | 로버트 블라락, 낸시 러슬로우, 댄 핑크햄, 크리스 리건, 래리 스티븐스, 크리스토퍼 디어돌프, 다니엘 노센척 |
4. 1. 기획 및 각본
브랜든 스토다드 ABC 모션 픽처 사업부 사장은 ''차이나 신드롬''을 감명 깊게 본 후, 핵전쟁이 미국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는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다.[7] 그는 텔레비전 영화 및 미니시리즈 부사장인 스튜 사무엘스에게 대본 개발을 요청했고, 사무엘스는 이야기의 초점이 핵전쟁 자체가 아니라 그 여파에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제목을 ''그날 이후''로 정했다. 1981년, 스토다드는 베테랑 텔레비전 작가 에드워드 휴메에게 대본을 의뢰했다. 제작 자금을 지원한 ABC는 영화의 노골적인 묘사와 가족 친화적인 텔레비전 채널에서 이 주제를 적절하게 묘사하는 방법에 대해 우려했고, 휴메는 핵전쟁에 대한 방대한 양의 조사를 수행하고 ABC가 줄거리와 등장인물을 받아들일 때까지 여러 초고를 거쳤다.원래 영화는 미주리주 캔자스시티를 중심으로 제작될 예정이었다. 캔자스시티는 원래 대본에서 폭격을 받지 않았지만 화이트먼 공군 기지는 폭격을 받아 캔자스시티는 충격파로 고통받았고 생존자 무리가 마을로 몰려들었다. 이야기에는 캔자스주 로렌스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햄프턴"이라는 작은 캔자스 타운은 있었다. 휴메는 대본을 쓰는 동안 로케이션 촬영 경험이 풍부한 프로듀서 로버트 파파지안과 함께 캔자스시티를 여러 차례 방문하여 로케이션을 물색했고, "햄프턴"에 적합한 장소를 찾기 위해 캔자스 영화 위원회와 캔자스 관광청 관계자들을 만났다. 결국 미주리주 워렌스버그와 캔자스주 로렌스, 두 개의 대학 도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워렌스버그는 센트럴 미주리 주립대학교가 있었고 화이트먼 공군 기지와 가까웠으며, 로렌스는 캔자스 대학교가 있었고 캔자스시티와 가까웠다. 휴메와 파파지안은 대학교, 병원, 축구 및 농구 경기장, 농장, 평평한 시골 등 여러 좋은 장소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로렌스를 선택했다. 로렌스는 또한 미국의 "지리적 중심지"로 합의되었다. 로렌스 사람들은 ABC에 대본에서 "햄프턴"이라는 이름을 "로렌스"로 변경하도록 촉구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평균적인 미국 시민에 대한 핵전쟁의 진정한 영향을 보여주는 TV 영화를 만드는 아이디어는 여전히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ABC, 휴메, 파파지안은 핵 폭발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최첨단 특수 효과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복잡한 폭발 장면을 위한 스토리보드를 작성하기 위해 업계 최고의 특수 효과 전문가들을 고용하는 것으로 첫 단계를 밟았다. 그런 다음 ABC는 로버트 버틀러를 프로젝트 감독으로 고용했다. 몇 달 동안, 그룹은 스토리보드를 작성하고 대본을 반복해서 수정했다. 그러다 1982년 초, 버틀러는 다른 계약상의 의무 때문에 ''그날 이후''에서 하차할 수밖에 없었다. ABC는 다른 두 명의 감독에게 프로젝트를 제안했지만, 둘 다 거절했다. 결국 5월에 ABC는 ''스타 트렉 2: 분노의 칸''을 막 완성한 영화 감독 니콜라스 메이어를 고용했다. 메이어는 처음에는 불안해했고 ABC가 검열관의 영향 없이 핵전쟁에 관한 텔레비전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의심했다. 그러나 대본을 읽은 후, 메이어는 ''그날 이후''의 감독을 맡기로 동의했다.
메이어는 자신이 제안받은 대본을 촬영하고 싶어했다. 그는 검열관이 영화를 검열하거나 처음부터 영화가 일반적인 할리우드 재난 영화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메이어는 ''그날 이후''가 그러한 영화와 더 비슷할수록 효과가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시청자에게 핵전쟁의 사실을 제시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ABC에 어떤 거물급 TV나 영화 스타도 ''그날 이후''에 출연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했다. ABC는 동의했지만, 영화가 유럽에서 극장 개봉될 때 유럽 관객을 유치하는 데 도움이 될 스타 한 명을 원했다. 나중에 뉴욕시에서 부모님을 방문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던 메이어는 제이슨 로바즈와 같은 비행기에 탔고 그에게 캐스팅을 제안했다.
메이어는 여러 달 동안 핵 연구에 몰두했고, 그 결과 미래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 되어 매일 저녁 퇴근할 때마다 아팠다. 메이어와 파파지안은 연구 단계에서 ABC 검열관과 미국 국방부를 방문했고 둘 다와 갈등을 겪었다. 메이어는 네트워크 검열관이 영화에서 삭제하려는 대본의 요소에 대해 많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국방부는 소련이 먼저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점을 대본에서 명확히 한다면 ABC와 협력하겠다고 밝혔지만, 메이어와 파파지안은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메이어, 파파지안, 휴메, 그리고 여러 캐스팅 감독들은 1982년 7월 대부분을 캔자스시티를 여러 차례 방문하며 보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주로 이름 없는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한편, 캔자스시티 지역으로 날아가 현지 배우를 인터뷰하고 풍경을 물색했다. 그들은 작은 역할에 진짜 중서부 사람들을 찾기를 희망했다. 할리우드 캐스팅 감독들은 작은 역할과 조연을 맡을 현지 사람들을 찾기 위해 캔자스시티의 쇼핑몰을 돌아다녔고, 로렌스의 일간 신문은 현지 주민들이 엑스트라로 등록하도록 요청하는 광고를 게재했으며, 캔자스 대학교의 연극 및 영화 교수가 현지 캐스팅을 담당하기 위해 고용되었다. 약 80개의 대사 배역 중 15개만 로스앤젤레스에서 캐스팅되었다. 나머지 역할은 캔자스시티와 로렌스에서 채워졌다.
캔자스시티에 있는 동안, 메이어와 파파지안은 연방 비상 관리청 캔자스시티 지사를 방문했다. 핵전쟁 생존 계획에 대한 질문에 대해, FEMA 관계자는 뉴잉글랜드의 전화번호부에 대피 지침을 넣는 실험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약 6년 안에 모두가 그것들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 만남은 메이어가 나중에 FEMA를 "완전한 농담"이라고 언급하게 만들었다. 그 시기에 대본에서 "햄프턴"을 "로렌스"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메이어와 휴메는 로렌스가 실제 도시이기 때문에 더 믿을 만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미국 중부의 대표적인 역할을 하기에 완벽한 선택이었다. 그 도시는 "사회 문화적 혼합"을 자랑하며, 휴메와 메이어의 연구에 따르면 150개의 미니트맨 미사일 사일로가 근처에 있기 때문에 정확한 미국 지리적 중심지 근처에 위치해 있었고, 주요 미사일 표적이었다. 로렌스는 훌륭한 로케이션이 있었고, 그곳의 사람들은 프로젝트를 더 지지했다. 갑자기 캔자스시티에 대한 강조가 줄어들었고, 대본에서 그 도시를 파괴하기로 결정했으며, 로렌스가 영화의 주요 로케이션이 되었다.
4. 2. 촬영 및 편집
브랜든 스토다드 ABC 모션 픽처 사업부 사장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그날 이후''는 핵전쟁이 미국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영화이다.[7] 텔레비전 영화 및 미니시리즈 부사장인 스튜 사무엘스는 이야기의 초점을 핵전쟁 자체가 아니라 그 여파에 두기 위해 제목을 ''그날 이후''로 정했다. 이후 베테랑 텔레비전 작가 에드워드 휴메에게 대본을 의뢰했다. 제작 자금을 지원한 ABC는 영화의 노골적인 묘사와 가족 친화적인 텔레비전 채널에서 이 주제를 적절하게 묘사하는 방법에 대해 우려했지만, 휴메는 핵전쟁에 대한 방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여러 초고를 거쳐 ABC의 승인을 받았다.원래 영화는 미주리주 캔자스시티를 중심으로 제작될 예정이었으나, 촬영 장소 섭외 과정에서 캔자스주 로렌스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되어 변경되었다. 로렌스는 캔자스 대학교가 있고 캔자스시티와 가까우며, 미국의 "지리적 중심지"라는 점이 고려되었다.
핵 폭발 장면 묘사를 위해 최첨단 특수 효과 전문가들이 고용되었고, 스토리보드 작업이 진행되었다. 로버트 버틀러가 프로젝트 감독으로 고용되었으나, 계약 문제로 하차하고 니콜라스 메이어가 대신하게 되었다. 메이어는 검열 없이 핵전쟁을 다루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의심했지만, 대본을 읽고 감독직을 수락했다.
메이어는 검열이나 할리우드식 재난 영화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핵전쟁의 사실을 제시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ABC에 유명 배우를 출연시키지 말 것을 요구했고, ABC는 유럽 관객 유치를 위해 제이슨 로바즈를 캐스팅하는 데 동의했다.
메이어는 핵 연구에 몰두하며 미국 국방부 및 ABC 검열관과 갈등을 겪었다. 국방부는 소련이 먼저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점을 명확히 할 것을 요구했지만, 메이어와 제작진은 이를 거부했다.
1982년 7월, 메이어와 제작진은 캔자스시티를 방문하여 현지 배우들을 인터뷰하고 풍경을 물색했다. 할리우드 캐스팅 감독들은 캔자스시티의 쇼핑몰을 돌아다니며 현지인을 캐스팅했고, 로렌스 일간 신문은 엑스트라 모집 광고를 게재했다. 캔자스 대학교 연극 및 영화 교수가 현지 캐스팅을 담당했다.
연방 비상 관리청 캔자스시티 지사를 방문한 메이어는 핵전쟁 생존 계획에 대한 질문에 "완전한 농담"이라고 언급했다. 이후 대본에서 "햄프턴"을 "로렌스"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로렌스가 실제 도시이며 미국 중부를 대표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ABC는 원래 《그날 이후》를 광고 없이 4시간 분량으로 방영할 계획이었다.[8] 그러나 니콜라스 메이어 감독은 한 시간 분량을 잘라내어 하룻밤에 상영할 것을 제안했다. 방송국은 광고주를 찾기 어렵다는 이유로 메이어가 하룻밤 방송 버전을 위해 영화를 편집하도록 허락했다.[9]
메이어의 원래 편집본은 2시간 20분이었으나, 방송국 검열관들과의 갈등 끝에 최종 상영 시간은 120분으로 단축되었다.[10][11] 이 과정에서 많은 특수 효과 장면과 잔혹한 묘사들이 삭제되었다.
삭제된 장면에는 보잉 737 여객기에서 본 핵폭발 장면, 서독 주둔 미군의 전투 장면, 생존 학생들의 음식 다툼, 미군 병사 처형 장면 등이 포함되었다. 최초 방송에서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모방한 목소리가 사용되었으나, 이후 방송에서는 다른 배우의 목소리로 대체되었다.[14]
홈 비디오 버전은 다양한 상영 시간으로 출시되었으며, 2018년 키노 로버에서 두 개의 디스크 블루레이 스페셜 에디션을 출시하여 텔레비전 버전과 극장 버전을 모두 제공했다.[16]
''그날 이후''는 2개의 에미상을 수상하고 10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34]
수상 내역:
상 | 수상자 |
---|---|
제한된 시리즈 또는 특별 부문의 뛰어난 영화 음향 편집상 | 크리스토퍼 T. 웰치, 브라이언 코르시에, 그렉 딜론, 데이비드 R. 엘리엇, 마이클 힐켄, 프레드 저드킨스, 칼 마하키안, 조셉 A. 마이어, 조 멜로디, 캐서린 쇼어, 리처드 쇼어, 질 태거트, 로이 프렌더가스트 |
뛰어난 특별 시각 효과 업적상 | 로버트 블라락, 낸시 러슬로우, 댄 핑크햄, 크리스 리건, 래리 스티븐스, 크리스토퍼 디어돌프, 다니엘 노센척 |
4. 3. 검열 및 논란
브랜든 스토다드 ABC 모션 픽처 사업부 사장은 핵전쟁이 미국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영화를 만들고자 했고, 이는 ''그날 이후'' 제작의 계기가 되었다.[7] 제작 과정에서 ABC는 영화의 노골적인 묘사와 내용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에드워드 휴메는 핵전쟁에 대한 방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여러 차례 대본을 수정했다.제작 초기, 평균적인 미국 시민에게 핵전쟁이 미치는 영향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ABC, 휴메, 프로듀서 로버트 파파지안은 특수 효과 전문가를 고용하여 핵 폭발 장면을 위한 스토리보드를 작성했다. 로버트 버틀러가 감독으로 고용되었으나, 계약 문제로 하차하고 니콜라스 메이어가 대신하게 되었다. 메이어는 검열이나 전형적인 할리우드 재난 영화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핵전쟁의 현실을 제시하고자 했다.[12]
메이어는 핵 연구에 몰두하며 ABC 검열관 및 미국 국방부와 갈등을 겪었다. 검열관은 영화의 특정 장면 삭제를 요구했고, 국방부는 소련의 선제공격을 명시해야 협력하겠다는 입장이었으나, 메이어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후반 작업과 검열 문제로 인해 ''그날 이후''의 첫 방송은 1983년 11월로 연기되었다. 어린이가 핵전쟁에 대한 악몽을 꾸는 장면 등 일부 장면이 삭제되거나 수정되었다. 메이어는 이러한 검열에 대해 ''TV 가이드''를 통해 비판적인 입장을 밝혔다.[13]
한편, 조쉬 바라와 마크 그레이엄은 반핵 운동가로서 메이어로부터 영화의 불법 복사본을 입수하여 ''더 데이 비포''라는 PR 캠페인을 진행했다. 이들은 여러 평화 단체에 영화를 배포하고 상영회를 개최하여 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였다. 이러한 활동은 ABC 경영진이 영화를 보류하기 어렵게 만들었다.[12]
''그날 이후''는 방송 전부터 대규모 홍보 캠페인을 통해 큰 관심을 받았다. ABC는 "시청자 가이드"를 배포하고 전국적으로 토론 그룹을 결성하여 시청자들이 영화 내용에 대비하도록 했다.[13]
5. 반응 및 영향
반핵 운동가들은 ABC 방송 전에 영화의 불법 복사본을 입수하여 여러 평화 단체에 배포하고, 상영회와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더 데이 비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는 영화 방송 전부터 대중의 관심과 논의를 불러일으켰다.[12]
영화는 원래 1983년 5월에 방영될 예정이었으나, 후반 작업으로 인해 11월로 연기되었다. 검열 과정에서 어린이가 핵전쟁에 대한 악몽을 꾸는 장면 등이 삭제되었고, 제작진은 영화 내용이 실제 핵전쟁의 영향을 축소했다는 면책 조항을 추가해야 했다.[12]
프로듀서 세일즈 오가니제이션은 동구권, 중국, 북한, 쿠바에서 이 영화를 극장 개봉했다. 이 국제 버전에는 TV 방영 버전에는 없는 6분 분량의 장면이 포함되었다.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상영 한 달 전인 1983년 10월 10일에 이 영화를 보고 "매우 효과적이었고 나를 매우 우울하게 만들었다"고 일기에 적었으며, "핵전쟁"에 대한 정책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고 밝혔다.[31][27] 1987년, 레이건과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중거리 핵전력 조약에 서명하여 핵무기 감축과 금지에 이르렀다. 레이건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영화와 조약 서명을 직접 연관시켰다.[27]
이 영화는 1987년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 시대에 소련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다.
일본에서는 1983년 11월 26일 NHK '토요 리포트'에서 프로그램 일부와 토론회가 소개되었고,[37] 1984년 1월 쇼치쿠 후지 계열에서 극장 개봉했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같은 해 10월 21일 TV 아사히 '일요 양화 극장'에서 이례적으로 조기 방영되어 30.0%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5. 1. 미국 내 반응
''그날 이후''는 방송 전부터 대규모 홍보 캠페인을 벌였다. ABC는 핵전쟁의 위험성에 대해 논의하고 충격적인 장면에 대비하도록 50만 개의 "시청자 가이드"를 배포했고, 전국적으로 토론 그룹도 결성되었다.[13]1983년 11월 20일 일요일, 최초 방영 당시 존 컬럼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시청자들에게 경고하고 어린 자녀와 함께 시청하여 핵전쟁의 문제에 대해 함께 논의하도록 권장했다.[17] ABC와 지역 TV 제휴사는 상담원이 대기하는 1-800 핫라인을 개설했다. 핵 공격 장면 이후에는 광고가 없었다. ABC는 또한 테드 코펠이 진행하고 과학자 칼 세이건,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엘리 비젤, 전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 장군, 논평가 윌리엄 F. 버클리 주니어가 출연하는 ''나이트라인''의 ''Viewpoint''에서 생방송 토론을 진행했다. 세이건은 핵 확산에 반대했지만 버클리는 핵 억제의 개념을 옹호했다. 세이건은 군비 경쟁을 "휘발유로 가득 찬 방에 두 명의 앙숙이 있고, 한 명은 9천 개의 성냥을, 다른 한 명은 7천 개의 성냥을 가진 상황"으로 묘사했다.[18]
이 영화와 그 주제는 ''타임''[19], ''뉴스위크''[20], ''U.S. News & World Report''[21] 및 ''TV 가이드''[22]와 같은 잡지 표지에 실리는 등 언론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졌다. 비평가들은 핵전쟁을 선정적으로 묘사하거나 너무 온건하다고 평가했다.[23] 특수 효과와 핵전쟁의 현실적인 묘사는 칭찬을 받았다. 이 영화는 12개의 에미상 후보에 올랐고 2개의 에미상을 수상했다. ''레너드 말틴의 영화 가이드''에서 "평균 이상"으로 평가되었다.[24]
미국에서는 3,850만 가구, 즉 약 1억 명이 ''그날 이후''의 첫 방영을 시청했으며, 이는 TV 영화의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25] AC 닐슨 조사에 따르면, 추정으로 3,855만 가구, 1억 23만 명이 시청했으며 (전미 시청률 46.0%, 점유율 70%. 특히 시청률이 높은 디트로이트에서는 시청률 59.0%, 점유율 75%)[37], 핵전쟁의 공포에 대한 충격을 주었지만, 정치적 메시지가 너무 강하다는 반대 의견도 나왔다.
에미상 12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2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작품 자체도 높은 평가를 받아 프라임타임 에미상 텔레비전 영화 부문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이 영화가 상호 확증 파괴 전략이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메시지를 비판한 벤 스타인은 로스앤젤레스 ''헤럴드 익재미너''에 소련 점령 하의 미국이 어떤 모습일지 썼고, 이는 ''아메리카''에서 극화되었다.[26] ''뉴욕 포스트''는 마이어를 반역자로 비난하며 "왜 니콜라스 마이어가 유리 안드로포프를 위해 일하고 있는가?"라고 썼다.[27] 필리스 슐래플리는 "이 영화는 국가를 무장 해제하고 싶어하며 그 목적에 7백만 달러를 기꺼이 기부하려는 사람들이 만든 영화입니다"라고 선언했다.[27] ''내셔널 리뷰''의 리처드 그르니에는 ''그날 이후''가 "비애국적"이고 친소련적인 태도를 조장한다고 비난했다.[28] 많은 언론 평론은 영화에서 누가 전쟁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초점을 맞췄다.[27] 텔레비전 평론가 맷 졸러 사이츠는 ''TV (The Book)''에서 ''그날 이후''를 역대 미국 TV 영화 중 네 번째로 꼽았다.[29]
5. 2. 한국 내 반응 및 영향
주어진 원본 소스(`source`)에는 '한국 내 반응 및 영향' 섹션에 대한 내용이 없으므로, 이 섹션에 작성할 내용이 없습니다.5. 3. 국제적 영향
''그날 이후''는 방송 전에 대규모 홍보 캠페인을 받았다. 광고는 몇 달 전에 방영되었고, ABC는 핵전쟁의 위험성에 대해 논의하고 버섯 구름과 방사선 화상 피해자의 충격적인 장면에 대비하도록 시청자를 준비시키는 50만 개의 "시청자 가이드"를 배포했다. 전국적으로 토론 그룹도 결성되었다.[13] 1983년 11월 20일 일요일, 최초 방영 당시 존 컬럼은 영화가 충격적이고 불안한 장면을 포함하고 있다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시청자들에게 경고하고 어린 자녀와 함께 시청하여 핵전쟁의 문제에 대해 함께 논의하도록 권장했다.[17] ABC와 지역 TV 제휴사는 상담원이 대기하는 1-800 핫라인을 개설했다. 핵 공격 장면 이후에는 광고가 없었다. ABC는 또한 테드 코펠이 진행하고 과학자 칼 세이건,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엘리 비젤, 전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 장군, 논평가 윌리엄 F. 버클리 주니어가 출연하는 ABC의 간헐적인 토론 프로그램인 ''나이트라인''의 ''Viewpoint''에서 생방송 토론을 진행했다. 세이건은 핵 확산에 반대했지만 버클리는 핵 억제의 개념을 옹호했다. 세이건은 군비 경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휘발유로 가득 찬 방이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그 방에는 두 명의 앙숙이 있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은 9천 개의 성냥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 명은 7천 개의 성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 각각은 누가 앞서고 누가 더 강한지에 대해 걱정하고 있습니다."[18]이 영화와 그 주제는 방영 전후에 언론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졌으며, ''타임''[19], ''뉴스위크''[20], ''U.S. News & World Report''[21] 및 ''TV 가이드''[22]와 같은 잡지 표지에도 실렸다. 비평가들은 이 영화가 핵전쟁을 선정적으로 묘사하거나 너무 온건하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23] 특수 효과와 핵전쟁의 현실적인 묘사는 칭찬을 받았다. 이 영화는 12개의 에미상 후보에 올랐고 2개의 에미상을 수상했다.
미국에서는 3,850만 가구, 즉 약 1억 명이 ''그날 이후''의 첫 방영을 시청했으며, 이는 TV 영화의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25] 프로듀서 세일즈 오가니제이션은 동구권, 중국, 북한, 쿠바에서 이 영화를 극장 개봉했다(이 국제 버전에는 TV 방영 버전에는 없는 6분 분량의 장면이 포함되었다).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콜럼버스 데이인 1983년 10월 10일 상영 한 달 전에 이 영화를 봤다. 그는 일기에 이 영화가 "매우 효과적이었고 나를 매우 우울하게 만들었다"[31][27]고 적었으며, "핵전쟁"에 대한 당시의 정책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바꾸었다고 적었다.[32] 1987년, 레이건과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중거리 핵전력 조약에 서명하여 핵무기 감축과 금지에 이르렀다. 레이건의 회고록에서 그는 이 영화와 조약 서명을 직접적인 연관성으로 묘사했다.[27]
이 영화는 미국 외에서도 영향을 미쳤다. 1987년,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 시대에 이 영화는 소련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다.
일본에서는 1983년 11월 26일 NHK '토요 리포트'에서 본 프로그램과 그 직후에 열린 토론회의 일부를 소개했다.[37] 이어서 미국 텔레비전 방송 약 1개월 후인 1984년 1월 쇼치쿠 후지 계열에서 극장 개봉했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고 한다. 그 약 9개월 후인 같은 해 10월 21일 TV 아사히 '일요 양화 극장'에서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조기에 방영되어 30.0%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6. 평가
이 영화는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핵전쟁의 공포와 그로 인한 절망적인 미래를 현실적으로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핵폭발 이후의 참혹한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내어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또한, 영화는 단순한 재난 영화를 넘어, 핵무기의 위험성과 반핵 메시지를 전달하며 사회적,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7. 관련 작품
- 테스타먼트
- 바람이 불 때
- SF 핵전쟁 이후의 미래・스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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パーセントの裏っ側 『ザ・デー・アフター』米国の視聴状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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